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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몸으로 삶을 증명하다” - 한국편]

📑 목차

    거울 앞에서 우리는 종종 묻습니다.
    “여기 있는 나는 누구인가.”

    삶의 중간을 건너온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이 질문 앞에 선 적이 있을 겁니다.
    하지만 이 시리즈의 주인공들은 그 질문을 병실에서, 수술대 위에서,

    혹은 재활센터의 차가운 바닥 위에서 마주했습니다.
    그들에게 삶은 어느 날 갑자기 멈췄습니다.
    의사의 진단 한 줄이, 심장 박동의 불규칙한 떨림이, 몸의 절반을 빼앗아간 통증이
    인생의 무대를 강제로 닫아버렸습니다.

    이 시리즈는 바로 그 ‘닫힌 무대에서 다시 걸어나온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그들은 은퇴나 여유를 맞이한 시니어가 아닙니다.
    병이라는 절벽 끝에서, 두 번째 삶을 ‘다시 쟁취한 사람들’입니다.

    병을 이겨낸 사람들, 다시 세상으로

    병은 단순히 몸을 망가뜨리지 않습니다.
    사람의 ‘정체성’을 무너뜨립니다.
    한때 누군가의 부모였고, 일터의 일꾼이었고, 친구였던 이름들이
    ‘환자’라는 단어 아래에 묻혀버립니다.

    이 시리즈는 그 ‘환자’의 이름표를 다시 벗겨낸 사람들의 기록입니다.
    그들은 의학이 허락한 생존율 이상의 이야기를 씁니다.
    살아남은 것이 아니라, 다시 살아가기로 선택한 사람들의 이야기속으로

    함께 들어가 봅니다.

    다시, 몸으로 삶을 증명하다 — 암을 이겨낸 보디빌더 박향자씨의 두 번째 무대  

    병원에서 시작된 인생 2막의 서막

     

    2016년 봄, 박향자 씨는 평범한 50대 후반의 직장인이었습니다.
    아이들은 이미 독립했고, 남편은 은퇴를 앞두고 있었습니다.
    그녀의 하루는 단정하고 규칙적이었으며, 어쩌면 조금은 단조로운 나날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유방에 작은 혹이 만져졌습니다.
    단순한 피로나 호르몬 변화라 생각했지만, 병원 진단은 냉정했습니다.

    “유방암 2기입니다. 수술과 항암치료를 병행하셔야 합니다.”

    그 한마디가 그녀의 삶을 송두리째 흔들었습니다.
    그날 이후 그녀는 ‘환자’라는 이름으로 불렸습니다.
    항암 주사를 맞으며 머리카락이 빠지고, 체력은 무너졌습니다.
    손끝의 감각은 희미해졌고, 하루에도 몇 번씩 ‘이 고통이 언제 끝날까’라는 생각이 스쳤습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녀는 완전히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마음 한편에는 “지금이 아니면 안 된다”는 감각이 또렷하게 남아 있었습니다.
    병이 가져온 고통 속에서 오히려 삶이 더 선명하게 보였습니다.
    그녀는 자신에게 조용히 질문했습니다.

    “내가 진짜로 원하는 건 무엇일까? 살아있다는 걸 어떻게 증명할 수 있을까?”

    자전거 위에서 다시 시작된 하루

    시간이 흘러 항암치료가 끝난 어느 날, 그녀는 거울 앞에 섰습니다.
    짧게 잘린 머리, 굽은 어깨, 그리고 낯선 얼굴이 비쳤습니다.
    하지만 그 속에는 이전보다 더 깊은 눈빛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몸을 다시 움직이기로 결심했습니다.
    처음에는 천천히 걷기부터 시작했습니다.
    이후 자전거를 타기 시작했지만, 처음엔 10분도 버티기 어려웠습니다.
    숨이 차고, 다리가 떨렸지만 그 고통조차 좋았습니다.
    살아 있다는 감각이 온몸에 되살아났습니다.

    그 무렵, 오랜 이웃이자 작곡가로 활동하던 ‘겟(Gat)’이라는 친구를 우연히 만났습니다.
    그는 음악을 통해 마음을 치유하는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운동도 좋지만, 마음의 리듬도 찾아야 해요.”
    그 말이 이상하게 마음속에 남았습니다.

    그녀는 결국 피트니스 센터에 등록했습니다.
    항암 후 체중이 급격히 늘어나 있었고, 근육은 거의 남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하루 한 시간씩 꾸준히 운동을 이어갔습니다.
    근육통으로 며칠을 앓아누운 적도 있었지만, 그녀는 그조차 “살아 있다는 증거”라고 말했습니다.

    “몸이 반응한다는 건, 여전히 내가 살아 있다는 뜻이잖아요.”

    한계와 편견 앞에 선 몸

    암을 이겨냈다고 해서 세상이 그녀를 다르게 보아준 것은 아니었습니다.
    “나이에 비해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니에요?”
    “그 나이에 피트니스 대회라니…”
    주변의 시선은 여전히 차가웠습니다.

    첫 대회 리허설 날, 그녀는 무대 뒤 거울 앞에서 떨고 있었습니다.
    젊은 참가자들 사이에서 59세의 몸은 자연스레 눈에 띄었습니다.
    탄탄한 근육 대신 수술 자국이 남아 있었고, 조명 아래 드러날 상처가 부끄럽게 느껴졌습니다.

    하지만 무대 음악이 울리자 그녀는 생각을 멈췄습니다.
    그동안 쌓인 훈련의 리듬이 몸을 움직였습니다.
    그녀는 무대 중앙으로 걸어 나갔고, 포즈를 취했습니다.
    그 순간, 그녀는 더 이상 ‘암 환자’가 아니었습니다.
    그저 한 사람의 선수였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냉정했습니다.
    첫 대회에서 입상하지 못했습니다.
    심사평에는 ‘근육 밀도 부족, 포즈 불안정’이라는 문장이 적혀 있었습니다.
    무대 뒤에서 그녀는 혼자 눈물을 흘렸습니다.

    “내가 너무 늦게 시작했나…”

    하지만 눈물은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다음 날, 그녀는 다시 운동화 끈을 묶고 헬스장으로 향했습니다.

    “늦게 시작했으니, 오래가면 돼.”


    결말 — 몸으로 증명한 삶

     

    2024년 전국 시니어 피트니스 대회 1위 박향자씨 (출처 동아일보)

     

    몸으로 증명한 삶

    그로부터 3년이 흘러, 2024년.
    그녀는 다시 무대에 섰습니다.
    이번에는 서울에서 열린 전국 시니어 피트니스 대회였습니다.
    수백 명의 관객 앞에서 그녀는 당당히 걸어 나갔습니다.
    수술 자국이 남은 팔과 어깨,
    그 위로 흐르는 땀방울이 조명 아래 반짝였습니다.

    결과 발표가 이어졌습니다.
    “시니어 부문 1위, 박향자!”

    그 순간, 그녀의 몸이 굳었습니다.
    관객의 환호가 들려왔고, 눈물이 터졌습니다.
    그녀는 조용히 손을 들었습니다.

    “살아있다는 건, 이렇게 증명하는 것입니다.”

    그날 이후 그녀의 이름은 언론에 실렸습니다.
    ‘암을 이겨낸 보디빌더’, ‘59세의 인생 2막’.
    그러나 그녀는 인터뷰에서 담담히 말했습니다.

    “저는 단순히 살아남은 게 아니라, 다시 태어난 거예요.
    병이 제 몸을 약하게 만들었지만, 제 마음은 오히려 더 단단해졌어요.”

    지금도 그녀는 매일 새벽 6시에 일어나 운동을 합니다.
    가끔 강연 요청을 받기도 하지만, 여전히 자신을 ‘학생’이라고 소개합니다.

    “몸은 아직도 배울 게 많습니다. 아직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에필로그 — 병이 앗아간 것이 아닌, 병이 남긴 것

    박향자 씨의 이야기는 단순한 ‘암 극복기’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녀는 병을 통해 잃은 것이 아니라, 삶의 감각을 되찾았습니다.
    병은 그녀의 몸을 시험했지만, 동시에 ‘삶의 의미’를 선물했습니다.

    암 이후의 시간은 이전보다 훨씬 느리지만, 훨씬 깊었습니다.
    이제 그녀는 거울 속의 상처를 숨기지 않습니다.
    그것은 생존의 흔적이자, 두 번째 인생의 문장입니다.

    “누구나 병을 통해 한 번쯤 멈춰 서게 됩니다.
    하지만 멈춘다고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그때 비로소, 다시 걸음을 배우는 것입니다.”

    그녀의 삶은 ‘회복’에서 ‘창조’로 나아갔습니다.
    몸이 단순히 회복된 것이 아니라, 인생이 새롭게 쓰였습니다.
    지금도 전국 곳곳에서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운동을 시작한 시니어들이 늘고 있습니다.

    박향자 씨는 강연 무대에서 종종 이렇게 말합니다.

    “병은 제 삶을 멈추게 한 게 아니라, 새 길로 이끌었어요.
    두 번째 인생은 그저 다시 사는 게 아니라,
    내가 진짜 나로 사는 시간이더라고요.”

     

    이 글은 ‘병마와 싸워 이겨낸 시니어 인생 2막’ 시리즈의 첫 번째 이야기입니다.
    다음 주인공은 미국편- 뇌졸중을 이겨내고 일터로 복귀한 100세 공원 레인저, 베티입니다.

     

    “다시, 몸으로 삶을 증명하다”
    그 메시지는 국경과 나이를 넘어,
    우리 모두에게 같은 질문을 던집니다.

     

    "당신은 오늘, 어떤 이유로 다시 일어설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