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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을 이겨내고 다시 달리다 — 백혈병 생존자 아르템 알리스케로프 이야기
달리기의 끝에서 다시 시작된 인생
러시아 카잔의 겨울은 길고 차갑습니다. 대지는 흰 눈으로 덮이고, 강은 얼음으로 잠깁니다.
사람들은 추위를 피해 실내로 모여들지만, 그날 아침 한 노년의 남자는 거꾸로 얼어붙은 거리로 향했습니다.
2023년 초, 아르템 알리스케로프는 숨을 내쉴 때마다 흰 입김을 내뿜으며 천천히 달리고 있었습니다.
그의 발걸음은 일정하지 않았고, 호흡은 거칠었습니다.
하지만 그 순간, 그는 자신이 다시 살아 있다는 사실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의 나이는 예순둘. 의사였던 그는 한때 수많은 환자에게 “희망을 잃지 마세요”라고 말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몇 해 전, 그 말은 거울처럼 자신에게 되돌아왔습니다.
급성 림프모구성 백혈병. 그 단어는 의사로서 익숙했지만, 환자로서 듣는 순간엔 낯설고 무서운 언어였습니다.
그날 병원 복도에서 들은 의사의 목소리가 아직도 귀에 남아 있습니다.
“지금부터의 치료는 길고, 고통스러울 겁니다. 그래도 해내야 합니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마음속에서는 믿기지 않았습니다.
지식으로 수없이 본 병이었지만, 직접 겪는 고통 앞에서 모든 지식은 무력했습니다.
그날 밤, 그는 조용히 일기를 꺼냈습니다.
“내가 치료받는 입장이 되었다. 하지만 이 싸움은 내가 포기하지 않는 한 끝나지 않는다.”
그 문장은 그가 이후 수백 번 되새기게 될 생의 문장이 되었습니다.
병상 위에서 배운 시간의 의미
항암치료는 길고, 버거웠습니다.
시간의 개념이 무너진 병실에서 그는 아침과 밤의 구분조차 희미해졌습니다.
약물은 몸속의 암세포뿐 아니라 건강한 세포까지 파괴했고, 그는 체중의 30%를 잃었습니다.
손끝의 감각은 둔해지고, 심장은 종종 멎을 듯 뛰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창문 너머로 들어오는 희미한 햇살을 바라보며 스스로에게 말했습니다.
“오늘도 버티자. 살아 있는 한, 싸움은 계속된다.”
그의 곁에는 언제나 아내 나탈리아가 있었습니다.
그녀는 매일 병실로 찾아와 조용히 그의 손을 잡았습니다.
남편이 의식이 흐려질 때마다 그녀는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습니다.
“당신이 늘 말했잖아요. 삶은 의지로 이어지는 거라고.”
그 한마디는 약보다 강한 힘이었습니다.
그는 결국 다시 펜을 들었습니다.
‘나는 의사이지만, 지금은 환자다. 하지만 환자이기에 더 깊이 삶을 배운다.’
그는 병실의 벽을 바라보며 자신이 잃은 것보다 여전히 남은 것에 집중하기로 결심했습니다.
2년의 치료가 끝나고, 마침내 완치 판정을 받았을 때, 그는 거울 속의 낯선 얼굴을 마주했습니다.
머리카락은 거의 없었고, 눈 밑에는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지만,
그 눈동자에는 예전보다 훨씬 단단한 빛이 깃들어 있었습니다.
다시 걷기 시작한 남자
그는 퇴원하자마자 걷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병원 복도 끝까지 걷는 것도 숨이 찼습니다. 그러나 며칠 뒤, 그는 병원 근처의 작은 공원으로 향했습니다.
러시아의 겨울 바람은 살을 에는 듯했지만, 그 차가운 공기가 오히려 살아 있음을 느끼게 했습니다.
“한 걸음이라도, 어제보다 나아가자.”
그는 그렇게 매일 걸었습니다.
걷는 일은 단순한 운동이 아니라, 자신에게 주는 약속이었습니다.
조금씩 걸음이 길어지고, 심장이 다시 규칙적인 리듬을 되찾자 그는 깨달았습니다.
“삶은 몸이 아니라 마음이 끌고 가는 거야.”
완치 후 찾아온 새로운 두려움
2021년, 완치 후 3년이 지났을 때였습니다.
그는 다시 병원으로 돌아가 환자들을 진료했습니다.
하지만 마음 한켠에는 늘 불안이 있었습니다.
“언제 다시 병이 돌아올까?”
그 의문은 그를 조용히 옭아맸습니다.
사람들은 말했습니다.
“이제 무리하지 마세요. 쉬셔야죠.”
그 말은 선의였지만, 오히려 그의 발걸음을 멈추게 했습니다.
그 무렵, 한 친구가 우연히 그에게 말을 건넸습니다.
“아르템, 당신 같은 사람이 마라톤을 완주한다면, 그건 단순한 달리기가 아니라 ‘삶의 증명’이 될 거야.”
그 말은 농담처럼 들렸지만, 이상하게 가슴속에 남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결심했습니다.
“내 몸이 버티는 한, 달려보자.”
얼음 위의 훈련
러시아의 겨울은 혹독했습니다. 거리엔 눈이 쌓이고, 숨을 내쉴 때마다 입김이 하얗게 피어올랐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새벽마다 러닝화를 신었습니다.
3km, 5km, 10km… 거리는 조금씩 늘어갔습니다.
심장이 쿵쾅거릴 때마다 그는 그것을 ‘살아 있는 소리’라 여겼습니다.
넘어지고, 무릎이 얼음 위에 부딪혀 멍이 들었지만, 그는 웃었습니다.
“통증은 살아 있다는 증거야.”
그의 몸은 아직 완전하지 않았지만, 정신은 점점 단단해졌습니다.
그는 매일 새벽 노트를 꺼내어 썼습니다.
“오늘도 달렸다. 오늘도 살아 있다.”

마라톤 완주의 날
2023년 9월, 모스크바 국제 마라톤.
강변 도로에는 수천 명의 러너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그날, 아르템 알리스케로프는 러시아 국기 패치를 단 운동복을 입고 출발선에 섰습니다.
그의 왼손목에는 여전히 병원 팔찌의 흔적이 남아 있었습니다.
“이건 나의 상처이자, 나의 출발점이야.”
총성이 울렸고, 수많은 발소리가 동시에 울려 퍼졌습니다.
초반 10km는 순조로웠지만, 20km를 지나자 다리에 쥐가 났습니다.
25km 지점에서는 체온이 급격히 떨어지고 시야가 흐려졌습니다.
그는 멈춰 서고 싶었지만, 마음속에서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백혈병도 이겨냈는데, 이런 고통쯤이야 견딜 수 있어.”
그 한마디가 그를 다시 앞으로 밀어주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42.195km의 결승선을 통과했습니다.
환호와 눈물
결승선을 넘자, 사람들의 환호가 터져 나왔습니다.
러시아 혈액기증협회는 그의 완주를 “병을 이긴 러시아인의 상징적 기록”이라 발표했습니다.
많은 백혈병 환자와 가족들이 그의 이름을 인터넷에 검색하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의 완주는 단순한 체력의 결과가 아니라, 삶을 향한 끈질긴 믿음의 결실이었습니다.
그는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병을 이긴 게 아닙니다. 그 병이 나를 다시 태어나게 했습니다.”
그 말은 단순한 겸손이 아니라, 그의 인생철학이었습니다.
삶의 리듬을 다시 배우다
지금 그는 러시아 여러 도시를 돌며 암 환자들과 재활 중인 사람들에게 강연을 하고 있습니다.
그의 주제는 단순하지만 깊습니다.
“살아 있다는 건, 멈추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는 아침마다 러닝화를 신습니다.
겨울에는 눈밭 위를, 여름에는 강가를 따라 달립니다.
그의 속도는 예전보다 느리지만, 그 리듬은 이전보다 단단합니다.
그는 말합니다.
“인생은 멈춘 적이 없습니다. 다만, 내가 다시 걸음을 배웠을 뿐입니다.”
그의 발걸음은 오늘도 얼어붙은 길 위에서 삶의 박자를 새기고 있습니다.
그 길의 끝에는 병이 아닌 다시 살아가는 자신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인생은 멈춘 적이 없습니다.
다만, 내가 다시 걸음을 배웠을 뿐입니다.”
그의 발걸음은 오늘도 얼어붙은 길 위에서
삶의 박자를 새기고 있습니다.
그 길의 끝에는,
병이 아닌 ‘다시 살아가는 자신’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시니어 러너가 전하는 메시지
아르템의 이야기는 단순히 ‘병을 이겨낸 감동’이 아닙니다.
그것은 두 번째 인생을 선택한 한 시니어의 도전기이자, 삶의 리듬을 되찾는 인간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강연에서 종종 이렇게 말합니다.
“달리기는 단지 운동이 아닙니다. 그것은 내 안의 두려움을 이겨내는 연습이죠.”
지금도 그는 환자들과 함께 ‘희망 마라톤’이라는 재활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직접 러닝 코치로 참여하며, 환자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의 한 걸음이 바로 회복의 시작입니다.”
참가자 중에는 치료 중인 사람, 투병을 끝낸 사람, 그리고 가족들이 함께 달립니다.
그는 그 모든 이들을 보며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모두 다른 속도로 달리지만, 결국 같은 방향을 향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삶으로 향하는 길입니다.”
<시리즈를 마치며>
“한국의 박향자 씨, 미국의 베티 리드 소스킨, 그리고 러시아의 아르템 알리스케로프.
세 사람의 여정은 서로 다른 언어와 문화를 넘어, 한 가지 메시지를 남깁니다.
"삶은 언제든 다시 써질 수 있다. 그리고 그 문장은, 언제나 ‘다시’로 시작된다.”
다시, 시작하시겠습니까?
건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