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start Life — 가을, 인생의 두 번째 빛을 닮은 그림 한 점
가을은 세상 모든 색이 잠시 머무는 계절입니다.
나뭇잎은 떨어지지만, 그 색은 더 깊어지고, 햇살은 짧아지지만 더 따뜻하게 느껴집니다.
인생의 가을 또한 그렇습니다.
시간이 지나며 우리는 잃는 것이 아니라, 더 단단해지고, 더 고요해집니다.
그래서 오늘은 “한 점의 그림”으로 인생의 두 번째 빛을 이야기해보려 합니다.
젊음의 봄을 지나, 여름의 뜨거움을 견디고,
이제 자신만의 색으로 물들어가는 시니어의 가을 인생—
그 순간을 닮은 회화 한 점이 있습니다.
그림은 단순히 ‘보는 것’이 아니라 ‘머무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처럼, 잠시 멈춰 서서 바라보면
그 안에서 ‘나의 지난 시간’이, 그리고 ‘지금의 나’가 보입니다.
이 블로그의 ‘Restart Life 회화 시리즈’는
그림을 통해 삶의 의미를 다시 발견하고,
새로운 리듬으로 살아가는 시니어들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지금, 창밖의 가을처럼 고요하고 단정한 마음으로
한 점의 그림 앞에 서볼까요?
그림이 말을 걸어올지도 모릅니다—
“당신의 인생도 여전히, 아름답게 진행 중입니다.”
이우환 〈선으로부터 I〉, 침묵 속의 대화
오늘은 한 점의 회화, 이우환(Lee Ufan) 의 〈선으로부터 I〉를 통해 인생의 가을을 이야기해보려 합니다.
이 작품은 단순히 “선 하나”로 이루어져 있지만, 그 안에는 수많은 시간과 침묵, 그리고 존재의 흔들림이
담겨 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여백’ 속에서, 우리는 오히려 더 많은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작품 소개 — ‘선’으로부터 태어난 관계의 미학
〈선으로부터 I〉는 이우환이 1970년대 초반부터 이어온 ‘관계항(Relatum)’ 시리즈의
회화 버전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는 물감과 붓, 그리고 화면 사이의 ‘관계’를 통해 존재와 시간의 흔적을 표현했습니다.
한 번의 붓질은 단순한 동작이 아니라, 자신과 세계가 만나는 ‘사건’이 됩니다.
이 작품에서 보이는 선들은 일정하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강하게 시작되지만, 끝으로 갈수록 희미해지고, 사라지듯 멈춥니다.
이것은 삶의 흐름을 상징합니다 —
처음엔 열정으로 시작하지만, 점점 고요로 수렴해 가는 인생의 곡선처럼 말이죠.
이우환은 “나는 그리는 것이 아니라, 붓과 나, 그리고 화면이 서로 대화하도록 놓아두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즉, 그의 그림은 ‘표현’이 아니라 ‘대화’입니다.
침묵의 대화, 존재와 존재가 만나 만들어내는 울림의 미학이지요.
작품의 배경 — 일본 모노하(もの派)와 ‘존재의 흔적’
이우환은 1936년 경남 함안에서 태어나, 일본 유학 중 철학을 공부했습니다.
그는 ‘모노하(物派)’라는 일본 현대미술 운동의 이론적 중심이었습니다.
‘모노하’는 사물을 인위적으로 조작하기보다, 있는 그대로의 상태로 놓아두는 예술적 태도를 의미합니다.
그는 돌, 철판, 유리, 천 등 단순한 재료를 이용해
“인간과 사물, 사물과 공간, 존재와 시간의 관계”를 탐구했습니다.
〈선으로부터 I〉는 이런 철학의 회화적 확장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림 속의 선은 단순한 형태가 아니라, 존재의 ‘흔적’이자 ‘사이’의 기록입니다.
작가의 철학 — ‘여백’ 속에 존재하는 생명
이우환의 예술을 이해하기 위해선 ‘여백’을 보아야 합니다.
그는 “그리지 않은 부분이 가장 많은 말을 한다”고 말합니다.
여백은 공허가 아니라, 관계의 공간입니다.
그곳에서 선은 더 강렬하게 살아 숨 쉬며, 침묵은 깊은 울림이 됩니다.
그림을 자세히 보면, 선과 선 사이에는 멈춤이 있습니다.
그 멈춤 속에는 호흡이 있고, 기다림이 있고,
삶의 리듬처럼 느리지만 확실한 리듬이 존재합니다.
그것이 바로 이우환이 말하는 ‘존재의 리듬’입니다.
작가의 말 — “나는 세계와 대화하고 싶었다.”
이우환은 늘 말합니다.
“예술은 그리는 것이 아니라, 존재와 존재가 서로를 인식하는 순간이다.”
그의 작업은 표현이 아니라 만남의 기록입니다.
〈선으로부터〉 시리즈는 그 만남의 대표적인 형태로,
‘붓’이라는 도구와 ‘화면’이라는 세계가 만나 대화하는 흔적을 남깁니다.
그의 붓끝에는 계획된 계산 대신, 순간의 호흡이 있습니다.
한 획이 끝나면 그는 멈춥니다.
그리하여 화면에는 인간의 욕망이 아니라, 존재의 진실이 남습니다.
그의 그림은 말이 없지만, 묵직한 울림으로 관람자를 맞이합니다.
인생의 가을과 닮은 예술
시니어의 삶 역시 그렇습니다.
젊은 날의 격렬함을 지나, 이제는 멈춤과 여백의 미학을 배워가는 시기입니다.
이우환의 ‘선’은 인생의 한 줄기처럼,
끊어지는 듯 이어지고, 사라지는 듯 남아 있습니다.
그림을 바라보며 우리는 깨닫습니다.
‘멈춤’은 끝이 아니라 ‘깊어짐’이라는 것을.
우리의 인생도 여전히 진행 중이라는 것을.
그가 그린 선 하나에 담긴 고요한 울림은,
은퇴 후의 삶을 준비하는 모든 이들에게 ‘다시 시작할 용기’를 건넵니다.
작품 속 숨은 이야기 — 붓과 화면의 1cm 거리
이우환은 붓을 화면에 직접 대지 않고,
아주 미세한 거리(약 1cm)를 둔 채 붓끝의 긴장감으로 그린다고 합니다.
그는 “닿지 않는 거리에서 관계가 생긴다”고 했습니다.
그 1cm의 간격은, 인간과 세계의 거리이자,
관계가 시작되는 ‘틈’입니다.
이 짧은 간격 속에서 그는 존재의 긴장과 에너지를 포착했습니다.
그림을 보는 이들은 그 간격을 따라 시선을 이동하며,
마치 자신과 세계 사이의 거리, 인간과 인간 사이의 거리를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최근 전시 및 관람 정보 (2025년 11월 기준)
2025년 현재, 이우환의 개인전은 ‘이우환미술관 (일본 나오시마)’에서 상시 전시 중입니다.
그의 대표작 〈점으로부터〉, 〈선으로부터〉, 〈관계항〉 등이 전시되어 있으며,
건축가 안도 다다오가 설계한 공간 자체가 이우환의 철학을 시각적으로 구현하고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2025년 하반기, 부산 시립미술관 ‘이우환 공간’에서
그의 회화 및 조각 작품이 상설 전시 중이며,
오는 2026년 초 서울 국제갤러리 개인전이 예정되어 있습니다.
맺음말 — 선과 여백 사이, 다시 시작되는 삶
가을은 끝이 아니라, 다시 시작하는 계절입니다.
나뭇잎이 떨어지는 것은, 봄을 준비하기 위함이고
침묵이 깊어지는 것은, 더 큰 울림을 품기 위함입니다.
〈선으로부터 I〉 앞에 서면,
우리의 인생도 여전히 ‘진행 중’임을 느낍니다.
붓과 선, 여백과 호흡 사이에 깃든 그 ‘관계의 순간’처럼—
우리의 삶 역시, 멈추지 않고 대화하고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Restart Life”,
그 말은 결국 이렇게 속삭이는 듯합니다.
“아직도, 그리고 여전히… 당신의 선은 이어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