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세 자전거 할아버지, ‘독도는 우리 땅’ 전국일주 감동 실화”
한국 사회에 아직 인터넷보다 입소문이 더 빠르던 시절, 경기도 동두천의 작은 상점 앞에는 매일같이 낡은 자전거 한 대가 세워져 있었습니다. 그 자전거의 주인은 70대 중반의 노인이었습니다. 이름은 백은도. 사람들은 그를 ‘자전거 할아버지’라 불렀습니다. 하지만 그 별명 뒤에는, 단순한 취미생활이 아닌 ‘나라사랑’이라는 무거운 이유가 숨겨져 있었습니다.
평범한 노인, 특별한 결심
백은도 씨는 경기도 동두천 생연2동에서 작은 제일상회를 운영하던 평범한 상인이었습니다. 나이 일흔이 넘은 그에게 하루하루의 삶은 조용했지만, 2005년 봄, 한 신문이 전한 일본 시마네현의 ‘다케시마의 날’ 소식은 그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았습니다.
“일본이 또 독도를 자기 땅이라 주장한다고?”
그는 텔레비전 앞에서 오랫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독도는 우리 땅이라는 확신이 가슴속에 불처럼 일어났습니다. 하지만 그는 항의 집회나 성명서로는 만족할 수 없었습니다.
“몸으로 보여줘야겠다.”
그날 밤, 백은도 씨는 낡은 짐자전거를 꺼내 먼지를 털었습니다. 그의 나이 75세. 세상의 기준으로는 ‘이제 쉬어야 할 나이’였지만, 그는 ‘달려야 할 나이’로 받아들였습니다.
전국으로 향한 페달
2005년 3월, 백은도 씨는 상점 문을 닫고 전국일주를 향한 첫 페달을 밟았습니다. 자전거에는 태극기와 함께 ‘독도는 우리 땅’이라는 붉은 현수막이 펄럭였습니다.
그의 출발지는 동두천, 그리고 첫 목적지는 강원도 속초였습니다. 하루 100km를 달린다는 목표를 세웠고,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그대로 강행했습니다. 그는 숙박시설 대신 공원 벤치나 시골 정자에서 잠을 잤고, 식사는 편의점 삼각김밥이나 주민들이 건네준 주먹밥으로 해결했습니다.
피곤이 쌓여 자전거를 세울 때마다, 사람들은 물었습니다.
“이 나이에 전국일주요? 왜 그렇게까지 하세요?”
그는 늘 같은 대답을 했습니다.
“독도는 우리 땅입니다. 누군가는 알리고 지켜야지요.”
그의 여정은 점차 언론에 알려지기 시작했고, 작은 마을의 주민들이 길가에서 손을 흔들며 응원했습니다. 때로는 경찰이 순찰차로 뒤따르며 안전을 지켜주기도 했습니다.

길 위의 고독과 회의
하지만 길은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비 오는 경북 영주 근처에서는 언덕을 오르다 자전거 체인이 끊어졌습니다. 길가에 앉아 수리하던 그는 한참을 말없이 하늘을 올려다봤습니다.
“내가 왜 이 짓을 하고 있지? 누가 알아주기나 할까…”
몸은 젖고, 다리는 쥐가 나고, 마음엔 허무가 밀려왔습니다.
그러나 그때 지나가던 중년 운전자가 차를 세우더니 따뜻한 커피 한 잔을 건넸습니다.
“할아버지, 기사 봤어요. 진짜 멋집니다. 힘내세요!”
그 한마디가 다시 그의 발을 움직이게 했습니다. 백은도 씨는 그날 일기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몸은 힘들지만 마음은 따뜻하다. 길 위에서 사람들의 사랑을 배운다.”
그의 갈등은 바로 ‘이 길이 헛되지 않은가’였지만, 국민의 응원은 그에게 답을 줬습니다.
쓰러진 순간, 다시 일어서다
전국 일주가 절반을 지날 무렵, 남해안 구례에서 그는 탈진으로 쓰러졌습니다. 한낮의 뜨거운 태양 아래, 쉼 없이 달리던 그의 다리는 마침내 한계를 맞았습니다. 땀에 젖은 셔츠가 몸에 달라붙었고, 숨은 거칠게 끊어졌습니다. 지나가던 트럭 운전사가 급히 차를 세워 병원으로 옮겨줬고, 의사는 며칠은 반드시 쉬어야 한다고 단호히 말했습니다. 그러나 백은도 씨의 눈빛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이 몸이 회복되면, 다시 타야 합니다. 아직 독도는 남았습니다.”
그의 목소리에는 결심이 서려 있었습니다. 이틀 만에 그는 병원을 나섰습니다. 몸은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지만, 마음은 더욱 단단해졌습니다. 병실 창문으로 들어오던 햇살을 보며 그는 스스로에게 다짐했습니다. “포기하지 않는다. 나의 발로 이 길을 완주하겠다.”
그날 이후 그는 하루 목표를 줄였지만, 단 한 번도 멈추지 않았습니다. 전국의 초등학교 앞에서, 시장의 좁은 골목에서, 버스터미널 앞 계단에서 그는 자전거를 세우고 아이들과 시민들에게 전단을 건넸습니다. ‘독도는 우리 땅, 우리가 지켜야 합니다.’ 그의 손글씨가 적힌 문구가 바람결에 흔들릴 때마다 사람들의 시선이 멈췄습니다. 누군가는 미소를 지었고, 누군가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의 여정은 단순한 자전거 여행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대한민국의 끝’을 향한 약속이었고, 스스로에게 내린 시험이었습니다. 쓰러져도 다시 일어서겠다는 의지, 그 마음이 그를 앞으로 나아가게 했습니다. 구불구불한 해안도로를 달리며 그는 수없이 중얼거렸습니다. “독도는 우리 땅이다. 내가 달리는 이 길처럼, 결코 포기할 수 없다.”
마지막 페달, 그리고 남은 울림
한 달 남짓한 여정을 마치고, 백은도 씨는 다시 동두천으로 돌아왔습니다. 자전거는 녹이 슬고, 몸은 살이 빠졌지만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 밝았습니다.
그를 기다리던 마을 주민들이 박수를 쳤고, 기자들이 몰려왔습니다.
“할아버지, 이제야 끝났네요. 가장 힘들었던 순간은 언제였나요?”
그는 잠시 생각하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힘들었다기보다, 감사했습니다. 내가 가는 길마다 사람들이 독도 얘기를 꺼내주었거든요. 그게 다였어요. 그거면 됐습니다.”
그의 자전거 전국일주는 단순한 개인의 도전이 아니라, 한 세대의 메시지가 되었습니다.
이후 그는 자전거를 창고에 넣지 않았습니다. 지방 곳곳에서 ‘독도 사랑’ 강연을 이어갔고, 학생들과 함께 자전거를 타며 국토 종주에 나섰습니다.
그의 이야기는 다시 언론을 통해 알려졌고, 백은도 씨는 노년 세대의 상징처럼 회자되었습니다.
“몸으로 증명한 애국심”
백은도 씨의 여정은 화려한 스폰서도, 거대한 조직도 없었습니다. 그저 한 사람의 의지, 낡은 자전거, 그리고 한 장의 현수막뿐이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발걸음은 우리 사회에 묵직한 질문을 던졌습니다.
‘나이 듦이란 무엇인가?’
‘애국이란 말로만 하는 것인가, 아니면 행동으로 옮기는 것인가?’
그의 답은 명확했습니다.
“몸으로 증명하라.”
그는 시니어 세대에게도 새로운 길을 보여줬습니다. 은퇴 후의 삶이 끝이 아니라, 다시 사회를 향해 페달을 밟을 수 있는 또 하나의 출발점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 것입니다.
백은도 씨의 도전은 지금도 누군가에게 영감을 줍니다. 자전거를 타든, 책을 쓰든, 작은 봉사를 하든—그 모든 시작의 첫 발은 ‘마음의 페달’을 밟는 순간입니다.
우리 모두의 길 위에서
그가 달린 길 위에는 여전히 바람이 붑니다. 그 바람엔 그의 구슬땀, 웃음, 그리고 노래가 실려 있습니다.
“독도는 우리 땅, 우리 마음의 땅입니다.”
백은도 씨의 여정은 끝났지만, 그의 정신은 지금도 누군가의 페달 위에서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오늘도 누군가 길 위에서 그를 떠올립니다.
“할아버지, 당신 덕분에 우리 마음속 독도는 더 단단해졌습니다.”
그의 이야기는 단순한 감동을 넘어, 우리 모두의 삶에 묻습니다.
‘당신은 지금, 어떤 페달을 밟고 있습니까?’